서울행정법원 2010. 12. 23. 선고 2009구합51025 판결[친일반민족행위자지정처분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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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정법원 2010. 12. 23. 선고 2009구합51025 판결

[친일반민족행위자지정처분취소][미간행]

【전 문】

【원 고】원고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율촌 담당변호사 박해성 외 1인)

【피 고】행정안전부장관

【변론종결】2010. 12. 2.

【주 문】

1.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 5. 11.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의 행위를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의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 처분을 취소한다.

2. 원고의 나머지 청구를 기각한다.

3. 소송비용 중 2/3는 원고가, 나머지는 피고가 각 부담한다.

【청구취지】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이 사건 위원회’)가 2009. 5. 11.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의 행위를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 제2조 제7호, 제17호, 제19호의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 처분을 취소한다.

【이 유】

1. 처분의 경위

가. 이 사건 위원회는 2007. 11. 12. 원고의 조부인 망 소외 1(대판:소외인)(1890. 6. 22. ~ 1957. 8. 하순)을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로 선정한 후 2009. 5. 11.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의 아래와 같은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7호, 제17호, 제19호가 정한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하였다(이하 ‘이 사건 처분’).

(1)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1910. 10. 7. 조선귀족령에 의해 일본제국주의(이하 ‘일제’)로부터 후작의 작위를 받고 1945. 8. 15. 광복될 때까지 작위를 유지하였다. 이는 특별법 제2조 제7호가 정한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에 해당한다.

(2)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1939. 7.부터 조선총독부가 각종 관변기구와 민간단체를 망라하여 조직한 전시통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평의원을 지냈고, 1940. 11.부터 1942. 5.까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확대개편된 전시 최대의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을 지냈다. 이는 특별법 제2조 제17호가 정한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

(3)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1911. 1. 13. 일제로부터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168,000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1912. 8. 1.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자로서 한일관계에 특히 공적이 현저한 자’로 인정되어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1912. 12. 7. 정5위, 1916. 12. 11. 종4위, 1935. 1. 14. 정3위에 각각 서위되었다. 이는 특별법 제2조 제19가 정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

나. 이 사건 위원회의 활동기간이 2009. 11. 30. 만료됨에 따라 피고가 이 사건 처분에 관계되는 권한을 승계하였다.

[인정근거] 다툼 없는 사실, 갑 1호증의 1, 2의 각 기재, 변론 전체의 취지

2. 본안 전 항변에 관한 판단

가. 피고의 주장

(1) 처분성 여부에 관한 주장

특별법에 의하면, 이 사건 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조사한 후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결정하고,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 이를 대통령 및 정기국회 기간 중 국회에 보고하며,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사료를 편찬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사건 위원회가 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은 이 사건 위원회가 수행하는 순수한 조사활동의 결과에 불과하여, 그것만으로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나 원고의 권리의무에 미치는 아무런 영향이 없으므로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는 처분에 해당하지 않는다.

(2) 원고적격에 관한 주장

이 사건 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으로 사자(사자)인 조사대상자의 법률상 이익이 침해되지 않았고, 나아가 원고는 조사대상자도 아니어서 그 법적 지위에 아무런 영향이 없으므로 원고는 위 결정의 취소를 구할 법률상 이익이 없다.

나. 판단

(1) 처분성 여부에 관한 판단

(가)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는 처분이라 함은 행정청이 행하는 구체적 사실에 관한 법집행으로서의 공권력의 행사 또는 그 거부와 그밖에 이에 준하는 행정작용을 말하는 것으로서(행정소송법 제2조 제1항 제1호), 국민의 권리의무에 직접 영향이 있는 법적용행위를 의미한다.

(나) 특별법 제4조는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의 선정, 조사대상자가 행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조사, 친일반민족행위와 관련된 국내외 자료의 수집 및 분석, 조사대상자의 친일반민족행위의 결정에 관한 사항 등을 이 사건 위원회의 업무로 규정하여 이 사건 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조사 및 결정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고, 같은 법 제25조에 의하면 이 사건 위원회는 위원회 활동을 조사보고서로 작성하여 매년 대통령 및 정기국회 기간 중 국회에 보고하여야 하며, 같은 법 제26조에 의하면 이 사건 위원회는 그 활동기간 이내에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사료를 편찬하여야 하고, 같은 법 제27조에 의하면 이 사건 위원회는 위 조사보고서와 사료를 공개하여야 한다.

(다) 한편, 헌법 제10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조항이 보호하는 인간의 존엄성으로부터 개인의 일반적 인격권이 보장된다.

(라) 이 사건 위원회가 조사대상자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하는 경우 조사대상자의 명예감정은 물론 그에 대한 사회적 평가인 명예가 손상을 입어 그 인격권이 직접적으로 침해받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더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되면 그에 관하여 작성된 조사보고서와 사료가 대외적으로 공개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사건 위원회가 한 친일반민족행위의 결정은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였다고 결정된 조사대상자의 일반적 인격권을 제한하는 것이어서 이는 단순한 학술적 조사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의무에 직접 영향이 있는 법적용행위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다.

(마)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은 제2조, 제3조, 제5조에서 특별법 제2조 제6호 내지 제9호의 행위를 한 자의 재산 및 그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일정한 요건 하에 국가에 귀속하도록 하고 있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조사 및 선정을 함에 있어서 특별법 제3조의 규정에 따라 이 사건 위원회가 조사한 결과를 원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 사건 위원회의 결정은 위와 같은 점에서도 국민의 재산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법적용행위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다.

(바) 따라서 이 사건 위원회가 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은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는 처분에 해당한다. 이 부분 피고의 주장은 이유 없다.

(2) 원고적격에 관한 판단

(가) 이 사건 처분으로 인하여 조사대상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고 그 직계비속인 원고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므로, 이 사건 처분은 원고의 명예감정을 해칠 여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조사대상자에 대한 사회적 평가인 명예가 손상을 입어 그들의 인격권을 직접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된다.

(나)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2호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부터 상속받은 재산도 친일재산으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조사대상자의 직계비속인 원고는 이 사건 처분으로 인하여 재산권을 제한받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다) 특별법 제19조 제2항, 제24조, 제28조에 의하면 조사대상자 본인은 물론 원고와 같은 직계비속도 조사대상자 선정에 관한 통지수령권 및 이의신청권, 조사과정에 있어서의 의견진술권, 조사결과에 관한 이의신청권을 가지고 있다.

(라) 위와 같은 점에 비추어 볼 때, 원고는 이 사건 처분의 취소를 구할 법률상 이익이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 이 부분 피고의 주장도 이유 없다.

3. 이 사건 처분의 적법 여부

가. 원고의 주장

(1) 특별법 제2조 제7호와 관련하여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일제로부터 한일합병에 공이 있다는 이유로 후작 작위를 받은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 황실의 종친이라는 이유로 후작 작위를 받은 것에 불과하다.

(2) 특별법 제2조 제17호와 관련하여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에 불과하여 위 단체의 장 또는 간부의 지위에 있지 않았고, 나아가 일제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3) 특별법 제2조 제19호와 관련하여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대가로 은사공채, 한국병합기념장 등을 받은 것이 아니고, 또한 1910. 10. 7. 이미 정2위에 준하는 후작 작위를 받았으므로 정2위보다 낮은 정5위, 종4위, 정3위를 받은 것을 두고 위가 상승하는 의미의 서위를 받은 것으로 평가할 수도 없으며, 일제에 현저히 협력하는 행위도 하지 않았다.

나. 관계법령

별지 관계법령 기재와 같다.

다. 인정사실

(1)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의 5세 사손(사손)으로서, 1907. 3. 14. 시강원(시강원) 시종관으로 임명되었고, 1910. 6. 4. 종2품 가선대부 청풍군으로 봉해졌으며, 1910. 8. 25. 정2품 자헌대부에 올랐다.

(2) 일제는 한일합병 직후인 1910. 8. 29. ‘일본국 황제폐하는 공훈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을 수여하고 또 은금을 부여한다’고 규정된 한일합병조약문 제5조에 근거하여 황실령 제14호로 조선귀족령을 제정·시행하였는데, 조선귀족령 제2조는 ‘작(작)은 이왕(이왕)의 현재의 혈족으로서 황족의 예우를 받지 않는 자와 문지(문지) 또는 공로가 있는 조선인에게 수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3)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일제로부터 1910. 10. 7. 조선귀족령 제2조에 의하여 조선귀족 중 최고의 지위인 후작 작위를 받은 후(당시 일제는 총 76명의 수작대상 귀족명단을 작성하였으나, 그 중 일부는 수작을 거부하였다), 1911. 1. 13. 은사공채 168,000원을 수령하고, 1912. 8. 1. “종전 한일관계에 공적이 있다”는 이유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한국병합기념장은 한국병합에 직접 관여한 자 및 그에 수반한 업무에 관여한 자, 한국병합시 조선에 근무한 일본인 관리와 한국 정부 관리, 종전 한일관계에 공적이 있는 자 등 세 경우에 해당하는 자에게 수여되었다.

(4)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1912. 12. 7. 정5위에 서위된 후 1916. 12. 11. 종4위로, 1935. 1. 13. 정3위로 각 승급되었다. 일제는 조선귀족과 일본의 화족들 중 유작자 본인과 사자에게 서위하였고, 성년이 된 사람에게 처음 주는 것은 종5위였다. 일제는 1912. 12. 7. 조선귀족에게 처음 서위하였는데, 당시 종3위 1명, 정4위 10명, 종4위 23명, 정5위 16명, 종5위 16명에게 위를 내렸다.

(5)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1910. 10. 24.부터 1910. 11. 16.까지 조선귀족관광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당시 일제 천황을 비롯한 황족 등으로부터 환대를 받았고 이토 히로부미의 묘에 참배하기도 하였으며 1910. 11. 4. 일본 천황에게 작위 수여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또한 1910. 12. 25. 데라우치 총독 관저를 방문하여 작위 수여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하였고, 1914. 4. 12. 일본 황태후가 사망하자 동경으로 가 참배하였다.

(6)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1915. 1. 16.부터 일제의 협력과 지원 하에 조직된 불교계 중심기관인 삼십본산연합사무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고, 1917. 2. 21.부터 이완용 등의 주도로 설립된 친일단체인 불교옹호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7)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1925. 4. 18.부터 1940년경까지 조선귀족회의 이사를 지냈으며, 그 이후부터 1945. 8. 15. 광복될 때까지 조선귀족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조선의 귀족들은 1911년경 황실의 번병(번병)이 되어 충의(충의)를 진(진)하고 품성을 도야하며 사민(사민)의 모범이 되게 하고 상호간의 지식을 교환하며 환난(환난)을 상구(상구)할 목적으로 조선귀족회를 결성하여 일제나 천황가의 중요한 행사 등이 있을 때마다 대표자를 파견하여 충성을 표시하였다. 일제는 조선귀족회에 대하여 ‘조선에 있어서 귀족의 상호친선을 도모하고 품성의 도야, 학식 그 외의 향상 발전에 힘쓰는 것으로 단순한 사교적 단체가 아니고, 정치적·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단체로서 조선통치상에도 공헌하는 바가 많고, 실제로 공적을 계속 올리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8)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1928. 11. 10. 일제로부터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고, 1939년경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유림조직을 통제, 지배하기 위하여 결성한 조선유도연합회의 간부(참여)로서 활동하였으며, 1938년경 경성 서대문경찰서와 경성소방서 서대문 파출소 신축에 1천 원 기부한 것에 대하여 1940. 6. 20. 일제로부터 포장을 받았고, 1940. 11. 10. 일제로부터 기원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또한 1941. 7. 8. 중일전쟁 4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신궁에서 열린 기념제에 조선귀족 총대표로 참석하였고, 1941. 10. 22. 자발적인 황국신민화 운동을 벌이기 위하여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의 경성부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1942. 1. 28. 조선귀족회 회장의 자격으로 미나미 총독에게 조선귀족회에서 모금한 국방헌금을 전달하였고, 1942. 5. 30. 미나미 총독이 전임된 것과 관련해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에 큰 공적을 남겼다”는 요지의 담화를 게재하였다. 더불어 1942. 7. 8. 영미 및 장개석 격멸의 결의를 선양하기 위해 조선신궁에서 열린 국위선양기원제에 조선귀족 대표로 참석하였고, 1943. 5.경부터 일제가 조선귀족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직한 창복회의 이사를 지냈으며, 1943. 8.경 징병제 실시 감사헌금운동인 십전헌금운동을 전개하였다.

(9)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1939. 7.경부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평의원을 지냈고, 이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1940. 10. 16.경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편되었는데, 위 연맹에서 1942. 5경까지 평의원을 역임하였다.

(10)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전시총동원정책을 구사하면서 1938. 7.경 중일전쟁 발발 1주년을 기념하여 내선일체, 전시국책사업의 협력 및 전시체제의 확립 등을 목적으로 조선총독부 내에 관변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결성하였고, 도연맹, 부군도연맹, 읍면연맹 등 행정단위를 기본으로 하여 위 연맹의 지방조직을 결성하였으며, 지방조직과 별도로 위 연맹의 하부조직으로 학교나 직장 등을 단위로 하는 각종 연맹을 결성하였다. 위 연맹의 규약 제2조는 ‘본 연맹은 내선일체(내선일체), 거국일치(거국일치), 국민정신총동원의 취지의 달성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본 취지에 찬동하는 조선의 각종단체 및 개인으로 조직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위 연맹은 역원으로 이사장, 이사, 참사, 감사, 평의원을 두었고, 평의원은 가맹단체 관계자 및 개인 가운데 이사장이 위촉하는데, 이들은 평의원회를 조직하여 위 연맹의 중요한 사건으로 이사장이 회의에 부치는 사안을 심의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1) 일제는 전쟁이 확대되어 가자 1940. 10. 16.경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침략전쟁 수행에 총동원하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개편하여 전시 최대의 관변 통제기구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을 결성하였고, 조선의 모든 단체와 개인을 지역과 직장별로 조직하여 그 산하에 두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지도조직, 중앙조직, 지방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도조직은 조선총독부 내에 설치하고 기본방침을 심의 책정하였으며, 중앙조직은 총재와 부총재를 두고, 역원으로 고문, 이사, 참여, 평의원, 참사를 두었다. 총재는 조선총독을 추대하고, 부총재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추대하며, 평의원은 각종 단체의 역원과 기타 학식·경험이 있는 자 가운데 총재가 위촉하였다. 평의원은 평의원회를 조직하여 총재의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고, 평의원회는 총재가 소집하였다.

(12)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40. 10.경 당시 고문으로 조선군사령관 등 일본인 6명, 참여로 소외 2 외 일본인 9명, 이사로 조선인 14명과 일본인 32명, 평의원으로 조선인 50명, 참사로 68명이 있었다. 평의원은 주로 중추원 참의나 민간 유력자, 각종 사회조직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

(13) 이후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보완하는 각종 단체들이 조직되기도 하였는데, 그 중 하나로 1941. 10. 22. 조선임전보국단이 조직되었으며(1942년경 위 연맹에 흡수되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당시 경성부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인정근거] 다툼 없는 사실, 갑 3 내지 7호증, 을 1호증의 1 내지 15, 을 2호증의 1 내지 3, 을 3호증의 1 내지 5, 을 4호증의 각 기재, 변론 전체의 취지

라. 판단

(1) 특별법 제2조 제7호 소정의 친일반민족행위 여부

(가) 특별법 제2조 제7호는 일제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하고 있고,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1910. 10. 7. 일제로부터 조선귀족령 제2조에 의하여 후작 작위를 받았음은 앞서 본 바와 같으므로,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았는지에 관하여 본다.

(나) 위 인정사실에 이 사건 변론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제반 사정을 보태어 보면,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한일합병의 공으로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① 비록 한일합병조약문 제5조가 ‘공훈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을 수여하고 은금을 부여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조선귀족령 제2조는 ‘작(작)은 이왕(이왕)의 현재의 혈족으로서 황족의 예우를 받지 않는 자와 문지(문지) 또는 공로가 있는 조선인에게 수여한다’고 하여, 한일합병에 대한 공로가 없이 이왕(이왕)의 혈족으로서 황족의 예우를 받지 않는 자에게도 별도의 작위 수여 대상자로 정하였다. 따라서 조선귀족령 제2조에 따라 작위를 수여받았다고 하여 이를 한일합병의 공로로 작위를 수여받은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

②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기 전까지 수행하였던 관직은 한일합병을 비롯한 친일반민족행위와는 관련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소외 1(대판:소외인)의 나이도 20세 남짓에 불과하였고, 달리 소외 1(대판:소외인)이 한일합병에 기여하였음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조선귀족열전(갑 4호증)에는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의 작위 수여 이유로서 이왕가의 종친으로 가문이 높다는 점과 조부 소외 3의 공로가 참작할 만하다는 점만이 언급되어 있을 뿐 어떠한 친일행적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③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1912. 8. 1. ‘종전 한일관계의 공적이 있는 자’로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사실은 있으나,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위 후작 작위를 받기 이전부터 친일 행적을 한 것이 공적으로 평가되어 위 기념장을 받았다고 볼 만한 자료는 없는 점, 본격적인 친일행위는 오히려 위 수작 이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것은 수작 시기로부터 약 1년 10개월이 경과된 이후인 점 등에 비추어 보면,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일제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한일합병에 기여한 공로로 후작 작위를 받았다고 추단하기는 어렵다.

④ 과거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던 반민족행위처벌법(1948. 9. 22. 법률 제3호로 제정, 시행되었다가 1951. 2. 14. 법률 176호로 폐지)에서는 형사처벌 내지 재산 몰수의 대상을 “일본정부로부터 작을 수한 자”로만 규정하였으나 특별법 제2조 제7호는 친일반민족행위의 범위를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행위“로 제한하고 있다. 특별법 제2조 제7호의 적용을 받는 대상자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소급적으로 토지 등의 소유권이 국가에 귀속되는 결과 재산권을 박탈당하는 불이익을 받게 되므로, 그 대상자의 범위에 관한 법령을 처분의 상대방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확장 내지 유추해석해서는 안 된다.

⑤ 일제가 작위수여 대상으로 선정한 조선귀족은 ‘한일합병의 공’이라는 유일한 기준에 의한 것은 아니고 관력(관력)과 가문 등도 고려되었기 때문에 을사늑약에 반대해서 면직된 소외 4를 비롯하여 전 대신이었던 소외 5, 소외 6, 소외 7, 소외 8, 소외 9, 소외 10 등도 수작대상인 귀족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던 점(이들은 수작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친일행적도 드러난 바 없다), 또 일제는 조선귀족을 선정하면서 조선왕실의 종친은 당연히 그 범위에 포함시켜 이들을 회유와 포섭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에 따라 한일합병 당시 생존해 있던 왕실의 종친들은 일부 직명환수조치를 당한 종친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위를 수여 받았던 점 등을 고려하면, 조선귀족으로 수작 대상으로 선정되었거나 일제로부터 수작하였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한일합병의 공이 있었다고 추단할 수는 없다.

⑥ 피고는,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왕실의 종친으로서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위한 목적으로 수여하는 작위를 거절하지 않고 받은 행위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조하겠다는 의사표시로 인정될 수 있고, 따라서 적극적으로 매국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일제의 불법적 행위를 묵인하거나 순응한 행위 자체가 한일합병을 가능하게 하는 협력을 한 것이라는 취지로 주장한다.

그러나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왕실 종친으로서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고 수작도 거절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수작 이후에는 친일행각을 하고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적극 협력하였다고 하더라도, 일제가 합일합병 직후에 조선왕실의 종친을 회유, 포섭하기 위하여 수여한 작위를 받았을 뿐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수반하지 않은 수작 자체만을 가지고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았다고 인정함은 특별법 문언의 통상적인 의미를 넘는 해석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2) 특별법 제2조 제17호 소정의 친일반민족행위 여부

(가) 특별법 제2조 제17호는 일제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하고 있고,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1939. 7.경부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평의원을 지냈고, 위 연맹이 1940. 10. 16.경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편된 이후 위 연맹에서 1942. 5경까지 평의원을 역임한 사실은 앞서 본 바와 같은바, 위와 같은 행위가 위 규정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인지 여부에 관하여 본다.

(나) 위 인정사실 및 이 사건 변론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사정에 비추어 보면,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일제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인 위 각 연맹에서 간부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다. 이 부분 원고의 주장은 이유 없다.

①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1939. 7.경부터 1942. 5경까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을 역임하였는데, 규약에는 평의원이 역원(간부)으로 규정되어 있는 점, 평의원은 각종 단체의 역원과 기타 학식·경험이 있는 자 가운데 위 각 연맹의 이사장이나 총재가 위촉하였는데, 주로 중추원 참의나 민간 유력자, 각종 사회조직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점, 위 각 연맹은 중앙조직 산하에 각종 지방조직이나 하부조직을 두고 있는데, 평의원은 중앙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이사장이 회의에 부치는 중요한 사안이나 총재의 자문역할을 수행하였으므로 위 각 연맹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결코 가볍다고 볼 수 없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위 각 연맹 평의원은 특별법 제2조 제17호가 규정하고 있는 일제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간부라고 봄이 상당하다.

② 위 각 연맹에서 평의원의 임기는 1년으로 보이는데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3년 가량 지속적으로 평의원으로서 활동한 점,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평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친일단체인 조선귀족회의 이사 및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41. 10. 22.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보완조직인 조선임전보국단(1942년경 위 연맹에 흡수되었다)에 경성부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국방헌금을 주도적으로 모금하여 1942. 1. 28. 일제에게 국방헌금을 전달하는 등 수많은 친일행위를 활발하게 하였는바, 이는 일제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3) 특별법 제2조 제19호 소정의 친일반민족행위 여부

(가) 특별법 제2조 제19호는 일제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하고 있고,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일제로부터 1911. 1. 13. 168,000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1912. 8. 1.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1912. 12. 7. 정5위, 1916. 12. 11. 종4위, 1935. 1. 14. 정3위에 각각 서위된 사실은 앞서 본 바와 같은바, 위와 같은 행위가 위 규정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인지 여부에 관하여 본다.

(나)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1911. 1. 13. 168,000원의 은사공채를 받고, 1912. 8. 1. ‘종전 한일관계의 공적이 있는 자’로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사실은 있으나,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후작 작위를 받기 이전부터 친일 행적을 한 공로로 은사공채 및 기념장을 받았다고 볼 만한 자료는 없고 본격적인 친일행위는 오히려 위 수작 이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은사공채는 수작 이후 약 3개월, 한국병합기념장은 수작 이후 약 1년 10개월 밖에 경과되지 않은 점에 비추어 보면,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일제로부터 받은 은사공채 및 한국병합기념장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대가로 받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다) 다만, 위 인정사실 및 이 사건 변론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사정에 비추어 보면,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일제로부터 받은 서위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대가로 받은 포상 또는 훈공이라고 봄이 상당하다. 따라서 이 부분만으로도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특별법 제2조 제19호 소정의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였다고 보기에 충분하므로, 결국 이 부분 원고의 주장은 이유 없다.

① 조선귀족의 서위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는 서위조례는 ‘무릇 위(위)는 화족, 칙임관, 주임관, 국가에 훈공이 있는 자, 표창할 효적이 있는 자를 서한다’(제1조)고 규정하고 있는바, 서위는 고위직이나 훈공이 있는 자 등에게 신분적 지위의 상승으로 포상하는 개념으로 보인다. 일제는 조선귀족령 제2조에 따라 한일합병이나 식민통치 등에 대한 공이 있거나 조선의 왕족을 포섭·회유하려는 목적 등으로 조선귀족에게 작위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는바, 이는 서위를 하는 목적과 다르다.

② 위 서위조례 제5조에 의하면 종4위 이상은 작에 준한 예우를 받는데 그 중 정2위가 조선귀족령에 의한 작위로 볼 때 후작에 준하는 서위로 규정되어 있다. 비록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서위되기 이전에 후작 작위를 받아 정2위에 준하는 예우를 받고 있었고,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이 받은 위가 정2위보다 낮은 단계였다고 하더라도, 위(위)와 작(작)은 앞서 본 바와 같이 그 수여 목적이 다르고 실제로 이미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들은 이후 그에 준하는 위를 받은 것이 아니라 별도의 경력이나 활동에 기초하여 위를 받았으므로, 작위의 등급 여부와 관계없이 일제의 식민통치 등에 협력한 대가로 위가 상승하였다면 특별법 제2조 제19호 소정의 친일반민족행위라고 볼 수 있다.

③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1914년경 일본 황태후가 사망하자 조선귀족의 대표로 조문을 하였고, 1915년경부터 친일단체인 삼십본산연합사무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으며, 1917년경부터 친일단체인 불교옹호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고, 1925년경부터 조선귀족회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더불어 1928년경 일제로부터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쇼와대례기념장을 받기도 하는 등 수 많은 친일행위를 하였는바,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의 위가 상승된 것은 위와 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대가로 보기에 충분하다.

(4) 소결

망 소외 1(대판:소외인)은 특별법 제2조 제7호 소정의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였다고는 할 수 없으나, 특별법 제2조 제17호, 제19호 소정의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였다.

4. 결론

원고의 이 사건 청구는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어 인용하고, 나머지 청구는 이유 없어 기각한다.

[별지 생략]

판사   성지용(재판장) 곽형섭 배예선